글 | 상쾌한코알라🐨

주말 저녁 뭐 볼까 고민하다가 브리저튼을 켰습니다. 시즌 1부터 챙겨본 시리즈인데, 시즌 2·3을 거치면서 솔직히 좀 지쳐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시즌 4는 달랐습니다. 한국계 호주인 배우 하예린이 여주인공으로 캐스팅됐다는 소식을 듣고 더 기대하며 봤는데, 예상보다 훨씬 깊이 있는 이야기가 펼쳐졌습니다. 진부할 것 같았던 신데렐라 서사가, 보고 나서는 생각보다 오래 머릿속에 남았습니다.
신데렐라 서사, 익숙한데 왜 또 빠져들었나
브리저튼 4의 원작은 줄리아 퀸의 소설 《신사와 유리 구두》입니다. 제목에서 이미 신데렐라 구조가 보이죠. 일반적으로 이런 클래식 서사는 뻔하다는 평을 받기 쉬운데, 제가 직접 봐보니 생각보다 그 공식이 꽤 잘 작동하고 있었습니다.
리젠시 시대(Regency Era)를 배경으로 한다는 점이 이 드라마의 기본 매력입니다. 리젠시 시대란 1811년부터 1820년 사이, 조지 4세가 왕세자 섭정을 맡았던 영국의 특정 시기를 가리킵니다. 이 시기는 귀족 사교계와 무도회 문화가 절정에 달했던 때로, 계급과 결혼이 개인의 운명을 결정짓는 시대였습니다. 그 배경 위에서 하녀가 가면 무도회에 참석해 귀족 남성과 사랑에 빠진다는 설정은, 사실 따지고 보면 19세기판 신데렐라 그 자체입니다.
그런데 이 드라마가 단순한 신데렐라 복사본이 아닌 이유가 있었습니다. 소피 베켓이라는 인물이 고전 동화의 수동적인 신데렐라와 확연히 다르게 그려졌기 때문입니다. 베네딕트가 "내 정부가 되어 달라"고 제안했을 때, 소피는 단호히 거절합니다. 사생아로 태어나 계모 아라민타 자작 부인의 손에서 하녀로 살아온 사람이, 자신의 자존심과 도덕을 팔 수 없다고 맞서는 장면은 제 경험상 이 시리즈 전체에서 손꼽히는 명장면이었습니다.
아는 맛이 무섭다는 말처럼, 신분을 숨긴 로맨스와 계급 갈등이라는 조합은 예측 가능하면서도 확실한 긴장감을 줬습니다. 그리고 그 긴장감의 중심에 소피의 자존감이 있었습니다.
소피 베켓, 이 캐릭터가 특별한 이유
일반적으로 로맨스 드라마의 여주인공은 사랑 앞에서 흔들리는 모습이 부각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소피 베켓은 달랐습니다. 그녀는 레스터 경의 사생아(庶子)로 태어났습니다. 사생아란 법적으로 혼인 관계가 아닌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를 뜻하며, 당시 영국 사회에서는 귀족의 피를 이었어도 사회적 지위를 인정받지 못하는 존재였습니다. 소피는 귀족 아가씨들과 똑같은 교육을 받았지만,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수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아버지 사망 후 계모 아라민타는 유언장을 위조해 소피에게 남겨진 지참금 18,000파운드를 가로챘습니다.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60억에서 80억 원에 달하는 금액입니다. 이 사실이 나중에 드러날 때, 저도 모르게 화면을 더 가까이 당겨보게 됐습니다. 소피의 고통이 단순한 드라마 장치가 아니라 당시 사회 구조의 폐단을 실제로 반영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하예린 배우의 연기는 솔직히 이 정도일 줄 몰랐습니다. 시즌 4 발표 이후 아시아계 배우 캐스팅을 둘러싼 논란이 있었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막상 드라마를 보고 나니 그 논란이 참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 경험상 이 시리즈 전체를 통틀어 가장 설득력 있는 여주인공이었습니다.
소피가 베네딕트에게 사랑을 느끼는 이유도 설득력 있게 그려졌습니다. 외모 때문이 아니라, 그와 함께 있을 때 비로소 자신이 삶의 주인공이 된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계모 밑에서 억눌려온 사람이 처음으로 자유를 경험하는 그 감정선이, 드라마 내내 자연스럽게 흘렀습니다.
- 사생아라는 신분적 한계 속에서도 귀족 수준의 교육을 받은 복잡한 배경
- 계모의 유언장 위조로 박탈당한 막대한 지참금, 결국 스스로 되찾는 서사
- 베네딕트의 부당한 제안을 단호히 거절하는 자존감 있는 태도
- 하예린 배우의 감정 표현이 캐릭터의 신뢰도를 끌어올린 핵심 요소
하인들의 삶으로 넓어진 세계관, 이게 진짜 차이였다
시즌 1·2·3을 보면서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이 있었습니다. 화면이 온통 귀족들의 무도회와 드레스, 그리고 그들의 스캔들로만 채워진다는 느낌이었습니다. 브리저튼 특유의 화려함이 매력이기도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 세계가 너무 평면적으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시즌 4는 그 부분을 파고들었습니다. 소피가 브리저튼 저택의 하녀로 취직하면서, 카메라가 처음으로 하인들의 공간을 제대로 들여다봅니다. 체계적인 업무 분담, 개인 공간, 친절한 고용주. 소피에게 브리저튼 저택은 계모 아라민타 밑에서의 삶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환경이었습니다. 이 장면들이 단순한 배경 묘사가 아니라, 당시 하인 계층의 노동 구조와 계급 간 처우 차이를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고 느꼈습니다.
미술적 완성도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브리저튼 시리즈는 로코코 양식(Rococo Style)의 화려한 인테리어와 의상으로 유명합니다. 로코코 양식이란 18세기 유럽에서 유행한 예술 사조로, 섬세한 곡선과 파스텔 색조, 장식적인 화려함이 특징입니다. 넷플릭스가 이 시리즈에 투자한 제작비 규모가 시즌 4에서도 고스란히 화면에 담겼습니다. 가면 무도회 장면이나 샬럿 여왕의 궁정 장면은 제가 직접 봤을 때 "이 정도면 구독료가 아깝지 않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 만큼 공들인 장면이었습니다(출처: Netflix 브리저튼 공식 페이지).
다만 솔직히 말하면, 전작들에 비해 귀족들 간의 긴장감 있는 기 싸움이나 폭발적인 스캔들 폭로 장면의 비중이 줄었습니다. 두 주인공의 감정선에 집중한 만큼, 장르적 쾌감은 다소 양보한 시즌이라는 점도 분명히 있었습니다.
시즌 4 평가, 시리즈 전체에서 어디쯤 서 있나
브리저튼은 시즌 1 방영 이후 넷플릭스 역대 시청 시간 기록을 갈아치운 시리즈입니다. 넷플릭스 공개 자료에 따르면 시즌 1은 공개 첫 28일간 약 8,200만 가구가 시청했습니다(출처: Netflix IR 공식 자료). 시즌 1과 스핀오프 《샬럿 여왕》은 호평을 받았지만, 시즌 2와 시즌 3에서는 전개의 속도감과 캐릭터 매력이 아쉽다는 평이 많았습니다. 제 경험상도 그랬습니다. 시즌 3 중반쯤에는 솔직히 배속으로 돌려보기도 했습니다.
시즌 4는 그 흐름을 어느 정도 바로잡았습니다. 완벽하지는 않습니다. 아라민타에 대한 소피의 복수가 명쾌하게 이루어지지 않은 점, 예측 가능한 서사의 진부함이 완전히 해소되지는 않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피 베켓이라는 캐릭터 하나가 드라마 전체의 무게중심을 잡아줬다는 느낌이었습니다.
또 한 가지, 브리저튼이 보여주는 다양성(Diversity) 세계관은 여전히 매력적입니다. 다양성이란 여기서 인종·계급·젠더 등 여러 배경을 가진 인물들이 동등하게 서사의 중심에 설 수 있는 구조를 뜻합니다. 백인, 흑인, 아시아인 귀족이 같은 무도회장에서 평등하게 어울리는 이 유쾌한 대안 역사(Alternate History) 세계관은, 현실이 어떻든 드라마 안에서만큼은 기분 좋은 긴장 해소가 됩니다. 대안 역사란 실제 역사적 사실을 일부 변형해 구성한 가상의 역사 설정을 말합니다. 이 세계관이 다음 시즌에서 어떻게 확장될지가 기대되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원작이 있는 베네딕트의 양성애자 설정 변경에 대한 논란, 캐스팅 과정의 인종 차별 논란 등이 시작부터 시즌 4를 둘러쌌지만, 드라마 자체의 완성도로 그 논란들을 상당 부분 상쇄했다는 게 제 판단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브리저튼 4는 시즌 1·2·3을 안 봐도 볼 수 있나요?
A. 각 시즌이 다른 남매의 로맨스를 다루는 구조라 독립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다만 브리저튼 가문의 분위기와 샬럿 여왕 등 조연 캐릭터들의 맥락을 알고 보면 시즌 4의 재미가 배로 늘어납니다. 저는 시즌 1부터 봤는데, 시즌 4에서 바이올렛 부인이 소피를 대하는 장면들이 더 깊이 느껴졌습니다.
Q. 브리저튼 4 원작 소설은 어떤가요?
A. 원작은 줄리아 퀸의 《신사와 유리 구두(An Offer from a Gentleman)》입니다. 일반적으로 원작 소설이 드라마보다 로맨스 감정선이 더 섬세하다는 평이 많은데, 드라마는 원작의 핵심 구조를 유지하면서 소피의 주체적인 면모를 더 강조했습니다. 원작을 먼저 읽은 분이라도 드라마에서 새로운 해석을 발견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Q. 하예린 배우 캐스팅 논란은 어떤 내용인가요?
A. 시즌 4 홍보 과정에서 아시아계 배우인 하예린에 대한 차별적 시선이 일부 있었다는 논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드라마가 공개된 후 실제 연기력과 캐릭터 완성도에 대해서는 대체로 호평이 이어졌습니다. 제가 직접 봤을 때도, 논란과는 별개로 소피 베켓이라는 인물을 납득시키기에 충분한 연기였습니다.
Q. 브리저튼 4에서 베네딕트가 양성애자로 나오나요?
A. 원작 소설에서 베네딕트는 이성애자로 설정되어 있지만, 드라마 시즌 4에서는 양성애자(Bisexual)로 변경되었습니다. 원작 팬들 사이에서는 설정 변경에 대한 의견이 엇갈렸습니다. 드라마 자체만 놓고 보면 그 설정이 베네딕트의 자유로운 성격을 표현하는 데 자연스럽게 녹아있다는 느낌이었습니다.
결론
브리저튼 4는 예측 가능한 신데렐라 서사라는 한계를 소피 베켓이라는 캐릭터 하나로 상당 부분 넘어선 시즌입니다. 제 경험상 시즌 2·3에서 흥미가 식었던 분이라면, 시즌 4는 다시 시도해볼 만한 이유가 충분합니다. 장르적 폭발력보다 감정선의 밀도를 선호하는 분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리젠시 시대의 계급 구조와 로코코 양식의 화려한 미술, 그리고 다양성이 공존하는 브리저튼의 세계관은 다음 시즌에서도 이어질 것입니다. 원작 소설을 읽어보거나, 시즌 1과 스핀오프 《샬럿 여왕》부터 정주행하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