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상쾌한코알라🐨

IMAX 예매 창을 열었을 때 이미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신작 오디세이는 개봉 첫 주 좌석이 사실상 전멸이었고, 저는 취소표를 며칠째 기다리다 토요일 저녁 맨 뒷줄 자리를 간신히 잡아 극장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3시간이 언제 지나갔는지 모를 정도로 스크린에 완전히 삼켜졌습니다. 일반적으로 그리스 신화 원작 영화라고 하면 화려한 신들의 전쟁이나 영웅의 무용담을 기대하기 마련인데, 제 경험상 이 영화는 그런 기대를 완전히 비틀어 놓는 작품이었습니다.
IMAX 연출, 기술을 지우는 기술
일반적으로 블록버스터 대작이라고 하면 압도적인 CG와 디지털 후반 작업을 기대하는 시각이 많습니다. 저도 솔직히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 나서, 그리고 제작 과정에 대한 후기를 찾아 읽고 나서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놀란 감독은 이번 작품을 전 분량 IMAX 65mm 필름으로 촬영했습니다. IMAX 65mm 필름이란 일반 35mm 필름보다 훨씬 넓은 면적에 이미지를 담는 포맷으로, 디지털 카메라 대비 압도적인 해상도와 질감을 구현합니다. 쉽게 말해 스크린을 가득 채워도 입자가 살아있는 그 특유의 깊이감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맨 뒷줄에서 봤는데도 화면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더 놀라웠던 건 거인족 키클롭스 같은 장면들이 CG가 아니라 착시와 원근법을 활용한 현장 직접 촬영, 이른바 인카메라 이펙트(In-Camera Effect) 방식으로 구현됐다는 점입니다. 인카메라 이펙트란 컴퓨터 합성 없이 카메라 앞에서 물리적 착시나 소품, 세트를 이용해 시각적 효과를 만드는 기법을 의미합니다. 레이 해리하우젠의 고전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이 가졌던 촉감 있는 질감이 이 방식을 통해 현대적으로 되살아난 셈입니다. CG 없이 모든 소품과 세트를 직접 제작했다는 후기를 접하고 나서, 솔직히 놀란 감독이 더 대단하게 느껴졌습니다.
텔레마코스의 여행 장면에서 수평선을 프레임 상단 9/10 지점에 배치하는 선택도 기억에 남습니다. 화면 대부분을 거친 바다로 채우면서 인물의 불안한 심리를 프레임 구성 자체로 표현하는 방식인데, 이게 말로 설명을 들으면 단순해 보여도 실제 IMAX 스크린에서 체감하면 전혀 다른 감각입니다.
- 전 분량 IMAX 65mm 필름 촬영으로 디지털과 다른 질감 구현
- 키클롭스 등 거인족 장면을 인카메라 이펙트로 현장 촬영
- 프레임 구도 자체를 심리 묘사 도구로 활용하는 연출 방식
- 레이 해리하우젠식 고전 질감을 현대 IMAX 포맷에 녹여냄
요약: 놀란은 기술을 자랑하는 대신 철저히 이야기에 종속시키는 방식으로 IMAX 필름 촬영과 인카메라 이펙트를 활용해, CG 범람 시대에 역행하는 장인 정신을 보여주었습니다.
죄책감 서사, 영웅을 무너뜨리는 방식
그리스 신화를 원작으로 한 영화라고 하면 흔히 신들의 개입과 운명에 끌려다니는 영웅의 이야기를 떠올리는 시각이 많습니다. 저도 유튜브로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 줄거리를 예습하고 들어갔을 때까지만 해도 그런 방향을 어느 정도 예상했습니다. 하지만 영화 속 오디세우스는 달랐습니다.
맷 데이먼이 연기한 오디세우스는 영웅적인 외피 아래 깊은 실존적 딜레마(Existential Dilemma)를 안고 사는 인물로 묘사됩니다. 실존적 딜레마란 자신의 선택과 행위가 낳은 결과를 직면하면서 삶의 의미와 정체성 자체가 흔들리는 내면의 위기를 가리킵니다. 트로이 목마로 전쟁을 끝낸 그의 지략은 동시에 수많은 희생을 낳았고, 그 무게가 귀환 여정 내내 그를 짓눌렀습니다.
영화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제우스의 법'이 이 서사의 핵심입니다. 제우스의 법이란 낯선 나그네를 환대해야 한다는 그리스 사회의 호혜 원칙, 즉 크세니아(Xenia)를 의미합니다. 트로이 목마는 바로 이 법을 기만으로 깨뜨려 얻은 승리였고, 오디세우스의 죄책감은 그 지점에서 출발합니다. 제가 직접 봤을 때 이 구도가 얼마나 정교하게 설계되어 있는지 영화 초반부터 느껴졌고, 한 장면도 놓치기 싫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젠데이야가 연기한 아테나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실제 신이라기보다는 오디세우스의 내면에서 울리는 양심이 인격화된 존재처럼 그려지는데, 이 선택이 영화를 신화적 판타지가 아닌 인간의 도덕적 성찰 드라마로 만드는 핵심 장치로 보입니다. 앤 해서웨이의 페넬로페와 샤를리즈 테론의 칼립소도 잔잔한 대사 속에서 표정 하나로 깊은 감정을 전달해, 저는 그 장면들이 오랫동안 머릿속에 남았습니다.
오펜하이머와의 연결도 제가 영화를 보면서 계속 떠오른 부분입니다. 핵을 만들어 전쟁을 끝냈으나 그 죄책감을 안고 살아야 했던 오펜하이머처럼, 오디세우스 역시 지략으로 승리했으나 그 대가로 스스로의 인간다움을 잃어가는 과정을 겪습니다. 두 작품이 이부작처럼 대칭을 이룬다는 점이 놀란 감독의 의도로 보입니다(출처: LiveWiki 영화 분석).
놀란 각색, 신화를 현재로 끌어오는 방식
원작인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는 신들의 개입과 미모로 인한 전쟁이라는 신화적 설정을 전면에 세웁니다. 일반적으로 이 원작을 영상화할 때는 그 신화적 요소를 그대로 가져오는 방향을 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제 경험상 놀란의 각색은 그 기대를 정반대로 뒤엎습니다.
트로이 전쟁의 발단을 미모 갈등이 아닌 무역 항로 이권 쟁탈이라는 현실적 구도로 재해석한 것이 대표적입니다. 저로서는 이 설정이 오히려 훨씬 납득이 갔습니다. 수천 년 전이든 지금이든 대규모 전쟁의 뒤에는 경제적 이해관계가 있다는 현실감이 더해지면서, 신화적 거리감이 줄어들고 오디세우스의 선택이 더 인간적인 맥락으로 읽혔습니다.
플롯 구조도 비선형 회고 형식(Non-Linear Retrospective Narrative)을 취합니다. 비선형 회고 형식이란 현재 시점에서 과거를 되돌아보는 방식으로 사건을 배열하되, 시간 순서를 따르지 않고 기억과 감정의 흐름에 따라 재구성하는 서사 기법을 의미합니다. 쉽게 말해 사건 자체보다 그 사건이 남긴 의미와 상처를 더 집중적으로 탐구하는 방식입니다. 칼립소의 섬도, 이타카도 시간이 정지된 것처럼 묘사되는 것은 오디세우스가 과거의 죄책감에 갇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상태를 시각화한 것으로 읽혔습니다.
결말도 원작과 다릅니다. 단순히 아내를 되찾고 왕국을 회복하는 해피엔딩이 아니라, 과거의 과오를 완전히 인정하고 속죄와 치유의 여정을 새로 시작하는 방향으로 마무리됩니다. 쓸쓸하면서도 희망적이었습니다. 전쟁이 인간을 어떻게 타락시키는가를 묻는 이 영화가 결국 황금률의 회복을 역설한다는 점에서, 26년 최고의 영화라는 평가에 저는 1000% 공감합니다(출처: 관련 영상 리뷰).
자주 묻는 질문
Q. 그리스 신화나 오디세이아 원작을 몰라도 영화를 즐길 수 있나요?
A. 저도 원작에 큰 관심이 없었지만 유튜브로 줄거리만 간단히 훑고 들어갔습니다. 그 정도 사전 지식으로도 충분히 몰입할 수 있었고, 오히려 놀란의 재해석 덕분에 원작을 모르는 분들이 더 자유롭게 감상할 수 있는 구조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트로이 목마와 키클롭스 정도의 기본 배경을 미리 알고 가면 초반 서사가 더 빠르게 읽힙니다.
Q. 3시간 러닝타임인데 지루하지 않나요?
A. 일반적으로 3시간짜리 영화라고 하면 중반에 늘어지는 구간이 생긴다고 알려져 있는데, 제 경험상 이 영화는 달랐습니다. 비선형 회고 서사 구조 덕분에 관객이 오디세우스의 기억을 함께 따라가는 방식이라, 다음 장면이 어디로 튈지 모른다는 긴장감이 계속 유지됐습니다. 3시간이 순간 삭제되는 경험이었습니다.
Q. IMAX가 아닌 일반 상영관에서 봐도 괜찮을까요?
A. 이건 솔직히 IMAX를 강력하게 권장하고 싶습니다. 전 분량을 IMAX 65mm 필름으로 촬영한 작품이라, 일반관에서는 프레임 구도나 공간감이 절반도 전달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저는 맨 뒷줄 IMAX에서도 충분히 압도됐는데, 일반관 정중앙보다 IMAX 뒷줄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Q. 오펜하이머를 보지 않아도 이 영화를 이해할 수 있나요?
A. 오디세이 단독으로도 완결된 서사입니다. 다만 오펜하이머를 먼저 본 분들이라면 두 작품이 이부작처럼 죄책감과 도덕적 책임이라는 주제로 연결된다는 걸 훨씬 깊이 체감할 수 있습니다. 오펜하이머를 인상 깊게 봤던 저로서는 이 연결 고리가 관람 내내 더해지는 층위가 있었습니다.
결론
워낙 거대한 대서사시를 경험하게 만든 작품으로 시각적 압도감과 묵직한 철학적 메시지를 즐기는 분, 크리스퍼 놀란 만의 재해석을 느끼고 싶은 분들에게 강력 추천합니다. 저는 이번 오디세이에 대해 더 조심스럽게 말하고 싶었는데, 저의 결론은 명확합니다. 3시간이라는 긴 러닝 시간이 너무나도 짧게 느껴졌다. 뒷이야기 그리고 또 다른 인물 중심의 해석 등 더 보고 싶다. 계속 보고 싶다..
완벽한 영웅이 아닌, 전쟁 트라우마와 죄책감에 시달리는 인간 오디세우스의 고뇌는 오히려 현실감을 더합니다. 위대한 영웅도 한낱 인간이었다는 것, 그리고 그 인간이 다시 황금률을 회복하려는 속죄의 여정이 오늘 우리에게도 유효한 질문을 던집니다. 아직 못 보셨다면 IMAX로, 취소표라도 기다려서 보시길 권합니다.
참고: https://youtu.be/vdQmLxUs2so?si=vYsAY2J50HxsYwQp